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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순간/플라톤 아카데미 - 어떻게 살 것인가?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대중강연] 3회. 임진왜란, 과거를 징계하여 훗날을 도모하다

Jon Lee 2014. 10. 6. 17:04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대중강연 - 어떻게 살 것인가? 3회는


"임진왜란, 과거를 징계하여 훗날을 도모하다"라는 주제를 놓고


명지대학교 사학과 한명기 교수님이 진행하셨다.


교수님은 이 강연을 통해 역사적 인물과 행적을 돌아보며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셨다.


거의 1시간 40분 동안 임진왜란부터 광복까지의 역사를 쉬지 않고 설명해주셔서,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하여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역사인식에 대한 한중일의 시선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고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정립을 할 수 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많은 것을 적지는 못 했지만 이번에도 강연의 포인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징비록 : 과거의 일을 돌아보아 훗날을 대비한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재상인 류성룡의 회고록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원인을 찾고 미래에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만든 책이다.


징비록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일본의 무도함과 조선 내부의 문제점을 함께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같은 옛날에 조선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나라의 정치체제에 반(反)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류성룡은 자신의 혜안을 징비록을 통해 드러내었다.






류성룡(1542~1607)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이순신을 수군대장으로 추천한 인물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을 배웠고, 양명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주자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색과 성찰이 지식과 더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고,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잠시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한국, 일본, 중국의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의 간극을 징비록과 함께 알아보자.



한국: 적개심


일본: 침략인정 회피


중국: 시혜자 인식



한국은 임진왜란에 대해 피해자 의식을 갖고 있고,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한 그 고통을 완전히 씻지 못한다고 여긴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당한 시기부터 임진왜란을 "문로경장의 전쟁"이라고 칭하였다.


강제 병합 이전 일본은 임진왜란을 "삼한정벌"이라 칭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다르게 칭한 이유는 우리 땅을 우리가 정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중국은 임진왜란에 대해 항외원조라는 말을 사용하며 시혜자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6.25 전쟁은 항미원조라고 칭하며 자신들이 전쟁을 도왔다는 생색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항외원조, 항미원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중국에게 임진왜란과 6.25전쟁은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7월, 중국의 주석 시진 핑은 서울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항외원조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임진왜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역사는 상황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유동성을 보임으로써 그 중요성이 대두된다.






다시 임진왜란의 전야로 돌아가 조선, 일본, 명나라의 상황을 간략히 파악해보자.


임진왜란 전 조선은 윤원형이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고 사림들은 그들의 비리를 청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대한 대처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또한 조선은 그 당시 문화적 우월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을 군더더기의 나라, 개돼지의 나라라고 부르며 무시했다.


반면 일본에는 신대륙 개척시대와 맞물려 포르투갈의 상인 파투가 일본의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하게 되었고,


그가 일본 영주에게 조총을 선물하면서 일본은 1년 만에 조총을 대량생산하였고, 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뎃뽀가 전래되었고, 은 생산이 격증하였으며, 국제감각이 확대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장거정의 개혁을 통한 반짝 중흥이 일었지만 쇠퇴하기 시작했다.


저 당시 명나라의 상황은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김영삼 대통령 시절과 비슷하다.


1997년 IMF가 일어나기 전 중국과의 회담에서 김영삼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자"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IMF 당시 일본 은행에게 빌린 돈이 가장 많아서 고생했으니 말이다.






임진왜란의 전개 양상은 이러하다.


1592년에는 육전에 열세를 보인 반면, 수전에는 공세를 보였다.


파천과 국가의 위기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이어송이 명나라의 포를 가져오지 않아 발생한 패전에서 비롯된다.


1593~1596년에는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고, 벽제에서 패하였다. 벽제에서 패한 이후 명군은 결전을 포기하였고,


임진왜란은 계속 중일전쟁으로 전락하였다. 강화협상만 4년을 하였다.


1597~1598년에 일본은 재침을 감행했다.






다시 류성룡과 이순신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류성룡은 그만의 혜안이 확실히 존재했다.


1591년 그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였고, 이순신은 그의 부대를 왜란 전날까지 훈련시켰다.


나라를 두 번이나 구한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선조는 이런 이순신의 행보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사실은 신하들의 말 때문에 두려워져서)


그를 고문하였고,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거치게 했다.


이어송의 패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류성룡이 이어송에게 찾아가 전쟁을 도와달라 하였지만 그의 부하들은 류성룡에게 직접 나가 싸우라고 하였다.


명군이 우리나라 군대를 다스리는 주체가 되니까, 일본보다 더 큰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명군은 싸울 의지가 없었고, 조선은 싸울 능력이 없었다. 일본은 잃을 게 없었다.


결국 그들은 패하게 되었는데, 이는 독자적인 힘이 없는 국가가 외군의 힘에 의지했을 때의 최후를 잘 보여준다.






류성룡은 치욕과 간난신고를 감수한 재상이었다.


그는 강화 이후 결전을 포기한 명군 설득에 혼신을 기울였고, 복국을 위해 현실을 수용하며 선조를 다독였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는 아리랑 3호가 발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최초의 인공위성 "아리랑 3호"를 만들어 발사했다는 기사가 수를 놓았다.


반면 일본에서는 "일본의 기술력으로 인공위성 아리랑 3호를 발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결국 인공위성을 만든 것은 우리나라지만, 일본이 인공위성을 발사할 기술과 장치를 제공한 것이다.


아리랑 3호가 발사된 장소와 시기 또한 매우 절묘하다.


아리랑 3호의 발사 장소는 일본 큐슈 남쪽의 다네가시마 섬이다. 이는 1543년 일본에 조총이 처음 전해진 장소이다.


또한 발사 시기는 2012년으로 임진왜란의 7주 갑자가 되는 해이다.


조선시대 군사력의 표준은 조총과 화기였고 오늘날 군사력의 표준은 미사일과 로켓이라는 것을 봤을 때,


우리나라는 아직 문명사적으로 표준에 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새로운 징비록이 필요하다.


우리는 복배수적의 한반도와 반복되는 동아시아의 격동 속에서 리더에게 필요한 능력과 책임감, 비전을 부여하여야 한다.


징비록에 담긴 성찰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한일전 축구경기에서 한국은 이 말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내건 적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런 말은 일본에게 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게도 해야 할 것이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것과 같이, 우리도 스스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다음 강연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조성택 교수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이다.


2회 때처럼 재미있는 철학 강의로 돌아갈 것 같아 기분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