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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대중강연] 2회. 질문하는 힘: 철학자가 던지는 5가지 물음 본문

순간의 순간/플라톤 아카데미 - 어떻게 살 것인가?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대중강연] 2회. 질문하는 힘: 철학자가 던지는 5가지 물음

Jon Lee 2014. 10. 2. 18:55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대중강연 - 어떻게 살 것인가? 2회는


"질문하는 힘: 철학자가 던지는 5가지 물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이석재 교수님이 진행하셨다.


이번 강연에 대한 한줄평을 우선 말하자면 "매우 흥미로웠고 즐거운 2시간"이었다.


평소 철학적인 사유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런 사유를 함께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님과 함께 사유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무튼 이번 강연의 포인트를 다시 한 번 짚어보도록 하겠다.


















질문은 왜 중요한가?


인생에서 질문은 잘 사는 삶과 앎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교수님은 질문하는 힘으로서의 철학과 철학자의 힘은 "묻고 따지는 힘, 참고 견디는 힘"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번 강연의 출발점이 드러난다.


"종교든 뭐든 의지할 곳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며 살 것인가?"






철학자가 던지는 다섯 가지 물음은 이것들이다.



1. 무엇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형이상학, 존재론)


2.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식론)


3. 좋은 논증(Argument)이란 무엇인가? (논리학)


4.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윤리학, 가치론)


5. 이전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철학사)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분하다.


교수님께서는 이 질문들을 던지는 목적은 이 질문과 답을 하는 과정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셨다.


아마 이것에 대한 정답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정의내려야 하는 지도 모르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 존재론(Ontology), 형이상학(Metaphysis)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데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대립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이 두 가지 논리는 함께 참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물질론에 따르면 만물은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은 그 혹은 그녀의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그 부모는 그 이전의 부모에 태어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존재는 그 이전과 이전을 거슬러 결정되는 것이다.


이 결정론에 반하는 자유의지의 주장은 이러하다.


만물의 생태가 결정되어 있었다면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


그 반대로 만물이 자유의지대로 만들어졌다면 만물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말은 모순이다.


그리고 결정론을 따라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인류는 도덕적인 문제를 안게 된다.


에를 들면 "네가 나를 아무리 싫어해도 너와 나는 결혼해서 애를 낳고 살게 되어 있어!"라든지,


혹은 "너는 원래 이 과목에서 F를 받게 되어 있었어!"라든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ㅋㅋㅋ






2.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인식론(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ge)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 지 물어보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뭔지 따져보는 것과 같다.


예전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생각으로 회의주의(Skepticism)을 내세우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심지어 형이상학에서는 그것들에 대한 가치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회의주의와 형이상학이 갖는 생각들이 어느정도 타당할 수 있는 예를 사고실험을 통해 들어보도록 하겠다.


가정 1. 멸종 위기의 외계인이 지구 밖에 존재한다.

       2. 이 외계인들이 멸종을 피하려면 특정 인간의 특정 뇌파가 필요하다. 그 특정 인간은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3. 이들은 기술력이 매우 뛰어나 특정 인간의 뇌파를 흡수할 수 있다.

       4. 어젯밤 지금 강연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가 울릉도의 지하 욕조에 납치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뇌파를 흡수당하고 있고,

           그들은 우리가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강연을 듣고 있다는 인식을 심고 있다.


회의주의와 형이상학은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서술한 예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타 세계의 자궁(Womb)이 사람들의 뇌에 기억을 심어주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 이해하면 편할 것이다.


이 가정에 대해 데카르트는 삼단논법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1. 우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울릉도 지하 욕조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2. 나는 내가 울릉도 지하 욕조에 있는 것이 확실치 않다.

3. 그러므로 나는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 있는 것이 확실치 않다.


인식론에 대한 나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 인식론은 상상력에서 비롯되고,


회의주의와 형이상학의 생각들이 우리 사회의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신이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라든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남에게도 강요하여 생기는 갈등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상상하여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현존하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상상)을 머릿속에서 적절히 분배하여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재밌는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3. 좋은 논증이란 무엇인가? - 논리학(Logic)


논증이란 문장 혹은 논제의 묶음이다. 논증에는 주장과 근거, 결론과 전제가 항상 함께 한다.


이 논증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재미있는 사유 요소이다. 데카르트의 예를 들어보겠다.


가정 1. 고래는 물고기이다.

       2. 물고기는 코를 곤다.

       3. 그러므로 고래는 코를 곤다.


이 논리는 많은 사람들이 알듯이 데카르트의 삼단논법으로, "A→B이고 B→C이면 A→C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이 가정은 매우 이상하다.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가정 1은 거짓이다.


또한 물고기는 코를 골지 못하므로 가정 2 또한 거짓이다.


하지만 가정 1과 2를 따르면 가정 3은 참이다.


논리학자는 이러한 논증을 좋아한다. 전제가 틀리고 맞는 것과 관계 없이 전제와 결론의 논리가 확실한 논증.


물론 이 논증은 가정 1, 2가 거짓이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은 논증이다.


타당한 논증(Valid logic)은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참이어야 한다.


타당한 논증은 진리를 보존하는 논증이 된다. 사실 전제가 반드시 참일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건전한 논증(Sound logic)은 전제와 결론이 모두 참인 논증이다.


친구들과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할 때, 전제가 거짓인 삼단논법을 내세우면서 우기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는 변태적인 생각을 해본다ㅋㅋ






4.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윤리학, 가치론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 정말로 좋은,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


⑵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삶인가?



이 두 질문 모두 윤리학의 큰 고민으로,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 의미를 파헤쳐 보도록 하자.




① 참으로 좋은 것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쾌락기계(Pleasure Machine)로 재미있는 사고실험을 했다.


이 쾌락기계에 들어가기 전에 기계에 어느 지시를 하면 들어가는 사람이 좋아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기계에 들어가 있으면 자신이 그 기계에 들어가 있다는 인식을 할 수 없게 되고, 그 기계에서 나올 필요도 없다.


당신은 이 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들어가지 않을 것인가?


이 사고실험의 재미있는 요소는 기계에 들어가는 사람과 들어가지 않는 사람의 행복의 입장차이에 있다.


일반적으로 기계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심리상태가 행복의 중요 요소라고 생각하고,


기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사람은 실재하는 것이 행복의 중요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무엇이 좋은지 스스로 사고실험을 하고 있다.


나는 사진을 찍고 그 결과물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장비를 사다보니 어느 순간 사진보다 장비가 더 좋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계속 따져보지 않는다면 나처럼 장비병에 걸린 카메라맨이 될 수 있고, 목적이 전도되는 현상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목적과 목적에 필요한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겠다.




② 좋은 것은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


소크라테스와 에우티프론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물었다.


"신성한 것이 무엇인가?"


"신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성한 것은 신들이 귀하게 여겨서 신성한 것이냐, 아니면 신성해서 신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냐?"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에서 전자는 주관주의와 관계있고, 후자는 객관주의와 관계있다.


주관주의는 가치 혹은 좋은 것이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의이고,


객관주의는 우리의 판단여부와 독립적으로, 가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주의이다.


주관주의는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지만,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기호가 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시대에 "유대인은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긴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객관주의를 따르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지만, 정당화의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한여름 식당에서 점심메뉴를 고를 때 두 사람이 다툰다. "물냉이 맛있냐, 비냉이 맛있냐?"


한 사람이 자꾸 우긴다. "비냉이 양념이 더 들어가있으니 비냉이 맛있어! 비냉 먹어!"


역사적으로 노예제, 인종차별 같은 제도가 객관적으로 좋다고, 객관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객관주의의 나쁜 예이다.


이처럼 "왜 특정한 가치가 객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그 근거를 찾기가 힘들게 된다.


수학자와 윤리학자가 자신들의 학문을 다루는 데 주의를 달리 하는 것도 또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차이를 보여준다.


수학자는 객관적인 지표로 학문을 다루는 데 반해, 윤리학자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객관주의를 중심에 두고, 주관주의를 겸비한 생각을 하는 것이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객관주의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말이다.




③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옳은 행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그런 기준은 정할 수 있는가?


공리주의에 따르면 옳은 행동을 정할 수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옳음은 결과가 결정한다.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옳은 행동이다."라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유관된 사람이 결과를 공유할 때, 즉 각각을 동일하게 취급할 때 그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반면 도덕적 의무론에 따르면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이 위배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두 가지 가치를 사고실험을 통해 더 알아보자.



가정 1.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제동장치가 고장났다. 불과 3킬로미터 앞에는 두 갈래의 선로가 있다.

           왼쪽 선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전철이 있고, 오른쪽 선로의 전철에는 사람의 거의 꽉 차있다.

           2킬로미터 앞에는 선로결정장치가 있다.

           과연 어느 쪽으로 가야 옳은 것일까?



공리주의에 따르면 어느 쪽 전철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든지 왼쪽으로 선로를 틀어 사고를 최소화할 것이다.



가정 2. 부잣집 청년이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 다쳐 쓰러진 할아버지를 목격했다.

           할아버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지만, 청년은 새로 산 비싼 차의 시트가 더럽혀질까봐,

           그리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도덕적 의무론에 따르면 이 청년은 잘못된 행동을 하였다.


도덕적 의무론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강력한 주의이다.


왜 강력하느냐?


2,000원을 기부하면 아프리카의 난민 5명의 하루 식사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신의 여자친구가 5,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시킬 때 이 이야기를 하면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여자친구의 아메리카노 결제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문제론에 대한 문제점 또한 존재한다.


1894년 오스트리아의 한 소년이 아사하기 직전 한 신부가 그 소년을 도와 살려주었다.


이 소년은 커서 히틀러가 되었다.


이처럼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과연 당장 옳은 일을 한 것이 결과적으로 옳은 일인가?"라는 결과의 무지 문제가 생긴다.


공리주의 또한 한계가 있다.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의사가 있다. 그는 장기이식 전문의다.


그의 병동에 네 명의 환자가 들이닥친다.


남북통일을 성사시키기 일보직전의 정치가, 노벨 평화상을 받기 직전의 위인, 암 치료 전문의,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개발자.


그들은 각각 폐, 허파, 간, 신장이식이 필요한데, 이 모든 장기가 자신의 장기와 들어맞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리주의가 참이라면 그는 그의 모든 장기를 이식해야 한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결과는 옳을 수 있어도 과정이 옳지 못하게 되는 한계를 지닌다.






5. 이전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해 주었는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전 철학자들의 견해가 여전히 유효하다"를 전제로 하도록 하자.


우리는 왜 질문을 하는가?


과연 답이 있을까?


답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답을 내리고 살고 있다.


그 답에는 제대로 된 답, 내게 맞는 답, 그리고 내가 내리는 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내린 그 답이 주어진 답인지, 그냥 취한 답인지, 답일 수 없는 것인지, 주체적으로 선택한 답인지 생각해보라.


결국 스스로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답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답을 찾는 제도가 그나마 제대로 된 답을 찾는 계기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이 따른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정말로 무엇을 잘 하는가?"




개인의 인생에서는 너무나 누적된 잘못된 판단이 있다.


이 잘못된 판단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진짜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고 싶은 건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누구나 잘 하는 것이 있다.


그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을 찾고, 찾았다면 그것을 위해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가자.









다음 강연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님의 "임진왜란, 과거를 징계하여 훗날을 도모하다"이다.


사실 부끄럽게도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역사를 알고 과거를 비추어 나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 다음 강연을 열심히 들어야겠다.